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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Quotation(인용)

by 글샘박선생 2017. 8. 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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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는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린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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