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otation(인용)

읽고 쓰는 까닭은/배우성

글샘박선생 2016. 5. 20. 07:59
읽고 쓰는 까닭은
배우성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누구라도 평가를 피해갈 수 없는 시대다.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글을 읽고 성찰했는지는 정량화하기 어렵지만, 대학은 누가 얼마나 많은 논문을 ‘높은 등급으로 공인(?)된’ 학술지에 게재했는지, 얼마나 많은 책을 펴냈는지 알고 싶어 한다. 평가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연구는 점점 더 엄두 내기 힘들어진다. 해마다 업적평가 서류를 내야 할 때가 되면 의구심이 든다. ‘이러다 그 소용돌이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들 때도 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읽고 쓴단 말인가?’

무모한 잔재주가 책을 망친다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홍대용에게도 이 문제는 고민거리였다. 우리는 그의 이름에서 ‘무한우주설’ 혹은 ‘실학자’의 이미지를 연상하지만, 사실 그는 문인이자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유취’(類聚)와 ‘분속’(分屬)은 저술가들이 남용하는 대표적인 전략이다. ‘유취’가 내용을 분류하고 모으는 행위라면, ‘분속’은 그 내용의 의미를 분석하여 쓰는 일이다. 문제는 이 방법들이 모두 ‘옛 제도’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책을 짓고 경전을 해석하려 든다. 그런 욕망이 ‘유취’와 ‘분속’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킨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책을 쓰다 보면 ‘유취’를 좋아하게 되어 손쉽게 책을 양산하게 되고, 경전을 해석하다 보면 ‘분속’에 힘쓰게 되어 절실하지 않은 학문들이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홍대용이 이 상황을 반드시 나쁘다고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책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책 안에 담긴 말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며, 그 책이 후학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무엇인가를 좋아하면 아래에서 그보다 더 심하게 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써내는 책이 많아질수록 실익(實益)이 없고, 경전을 해석하고 이치를 정밀하게 논할수록 마음은 점차 황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홍대용에게 ‘유취’와 ‘분속’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득보다 실이 훨씬 큰 ‘무모한’ 전략일 뿐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

  홍대용의 눈높이에서 볼 때, 학자라면 모름지기 사물에 응하여 생각할 때에는 현실에 적용할 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내면적으로 성찰할 때에는 안으로 참되게 본원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몇 줄의 글을 찾거나 고증하는 일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현실에 적용할 방안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더 많은 책을 보지 못할까 걱정한다. 본원이 날로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책을 많이 내지 못할까 걱정한다. 옛날 학자는 책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고 지금 학자는 책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옛날에는 책이 없었어도 영웅과 대학자가 나왔는데, 지금은 책이 많아도 인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니, 어찌된 일인가? 홍대용의 결론은 명확하다. 책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그 많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1775년(영조 51) 홍대용이 세손(뒷날의 정조)과 공부하는 자리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이날의 토론 소재는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보낸 편지였다. 주자의 말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논어를 읽고 그 의미를 알게 되면 나머지 경전들은 저절로 알게 된다.” 홍대용은 두 가지 의미를 특별히 강조했다. 책은 전일(專一)하게 읽어야 하며, 초심자가 책을 읽으면서 성급하게 이론을 세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독(多讀)이 아니라 정독(精讀)이 중요하며, 저술은 텍스트를 온전히 정독한 후에나 혹 가능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홍대용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독서할 때 먼저 그 대의(大義)를 본 다음에 그 곡절을 미루어보며, 반드시 사위(事爲)를 염두에 둘 것이요 장구(章句)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한 구절이라도 보면 알아야 하고 한 구절이라도 알면 행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알고 한 번이라도 행하다 보면 생각과 행동이 함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글자에 얽매이지 않는 공부, 배움과 실천이 일체화된 그런 공부였다.

‘지금, 여기’의 문맥에서 읽고 쓰기

  더 많은 정보에 효과적으로 접근하는 역량은 역사학 분야에서도 미덕(?)이 된 지 오래다.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많은 번역 사료들은 초심자들을 사료의 바다로 안내해 준다. 순발력과 문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검색한 결과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공할 수 있다. 심지어 화제가 되는 책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키워드 검색만으로 구성된 역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읽을거리와 쓸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도 업적 평가 서류에 채울 내용이 많지 않으니 지난해가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스스로에게 향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나는 지난 한 해 무엇을 읽고 왜 써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는 공부여야 한단 말인가?

  ‘읽고 쓰기’에 관한 홍대용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교훈적이고 또 실천적이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18세기 지식인의 전략을 오늘에 되살려낸다 한들 그것이 우리 사회 안에서 온전히 작동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교훈적인 이야기’가 그 자체로 얼마나 현대인을 감동시킬 것인지도 미지수다. 그 기억과 교훈이 계몽의 욕망으로부터 ‘발굴’된 것이라는 점도 문제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다. 바로 그런 지점들 때문에 홍대용의 질문을 지금 이 시대의 문맥에서 ‘전유’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모색 중이다.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던가? 하늘의 명을 알아야 할 나이를 넘기고도 아직 이러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감추어야 할 필요는 없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를 맴돈다. ‘지금, 여기’를 의식하면서, 나를 드러내면서 소통해가는 공부라면 어떨까? 무지와 굴레, 편견과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부라면 또 어떨까? 일회용처럼 ‘쓰고 버리는’ 공부가 아니라면 더욱 좋겠다. 인문학적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공부라면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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