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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정(不忘情)·불망사(不忘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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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샘박선생 2016. 6. 17.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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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정(不忘情)·불망사(不忘謝)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통해 타자에 대한 감각의 윤리 문제를 제기했다(『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타인의 고통을 자기 문제로 사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 된 도리, 사회적 존재로서의 윤리에 눈을 뜨고 실천하는 진정한 멤버십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관여가 상대에게는 또 다른 고통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괴로움에 빠진 어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또 어떤 사람은 그저 가만히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어렴풋이 알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깊이 위로받는다. 호기심과 관심, 배려와 이해에 대해 숙고해야 하는 이유다. 호기심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관심은 진정으로 타자적인 것이다.   트라우마라는 함정, 위로에 취약한 사람들  사람들의 호기심은 때로는 잔인해서, 고통을 겪는 상대방에게 해서는 안 될 질문을, 단지 상대에 대한 관심이라는 명분과 착각 속에서 던지는 경우가 있다. 관심과 호기심의 차이에 대해 숙고하지 않은 이는 반드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어떤 사유로든지 간에 스스로 같은 질량의 심리적 충격을 받을 거라고 짐작하는 편이다. 마음의 작용도 만고불변 우주의 물리적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상처를 주는 이 또한 같은 크기의 에너지로 자기 안에 상처를 받는 게 아닐까.   상처받은 이는 먹지처럼 그저 가만히 있지만, 그 마음의 파장은 깊이 충격 받은 물체가 안으로 내진을 끌어안은 것처럼 요동치고 있어서,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강렬한 에너지로 전달되기 마련이다(그러므로 불행감, 우울감, 분노 등은 언어 없이 전파된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신체 또한 물질성을 가진 하나의 우주이기에.).   나는 트라우마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것이 마음의 문제라면 보편적인 매뉴얼이나 일률적인 치료법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개인성의 영역(경험, 역사, 성격, 기질, 가치관 등)일 것이다. 상담심리나 정신병리학에 대한 상식적 수준의 정보에 따라, ‘나는 네게 관심이 있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러니 ‘너의 상처를 말해’라고 하는 것은, 때로 관심의 외연을 한 폭력이 될 수 있다.(그래서 나는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에게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이 자신과 다른 종류의 개체임을 항상 자각하고, 경험에 의존한 판단이나 전문가에게 모든 앎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그저 안이하게 살아가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누구나 자기 삶의 전문가로서 앎을 단련하고 실천하려는 성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제언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이런 경지에 이미 도달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 역시 이에 미숙한 이로서,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마음의 동료를 모으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위한 개인의 도리무라카미 하루키가 영혼의 어두컴컴한 밑바닥까지 함께 내려간 유일한 사람, 이라고 말했던(『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6, 326쪽) 심리분석가 가와이 하야오에 따르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3년 동안이나 말하지 않고 버팀으로써 마침내 치유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고은진 옮김, 문학과사상사, 2004, 29쪽). 이것은 임상적 실재이므로, 결코 상상적 가설이나 가상의 데이터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앞의 책, 110쪽)   사람은 항상 열린 봉투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살아갈 수 없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사람이란 그렇다. 때로는 스스로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껴안고, 힘겹게 한 걸음씩 자기만의 생애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고 평온한 표정과 태도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어젯밤 그(녀)에게는 예기치 않게 파란 많은 사건이 휘몰아쳤을 수도 있고, 그 내면에는 회오리와 해일이 일고, 마음의 비등점이 한없이 치솟아,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끓어 넘치는 그 힘으로 자기 발등에 상처를 입히는지 모른다.   관계의 ‘깊은 구멍’에 함락되지 않는 법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충분히 알아차리는 것 이외에,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스스로 노력해서 배우고, 부족한 자신의 앎을 채우기 위해 서로 대화해야 한다. 학교에 대해서도, 제도교육이란 게 그저 그렇지, 하고 포기하는 대신, 이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고 정현종 시인이 말했지만, 또한 그 사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레일처럼 길게 누워 하시라도 말아 올릴 기세로 긴장하고 있는, 악어의 혓바닥 같은 검은 감정의 터널,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함정이 자리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관계성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환기한다. 그래서 고통 받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얄팍한 호기심이나 흔해 빠진 위로보다 먼저, 인내심을 갖춘 배려, 기다림, 이해 깊은 침묵 속의 공존에 대해 배워야 한다(전통적 용어로는 이것이 ‘품격’이다.).   때로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과 정을 잊지 않는 힘, 지금 그 사람과 함께 숨 쉴 수 있다는 생명의 섭리에 대한 감사함을 느껴야, 어려운 시간의 내를 함께 건널 수 있다. 말없이 곁에서 묵묵히 함께 있다는 감각이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간의 고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경험 자산을 공유하려는 대화와 연습이 필요하다. 정을 잊지 않고, 감사함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다움에 대해, 스스로가, 사회가 그에 대한 인정구조를 만들고 지탱하는 문화를 만들 때까지, 타인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곁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에너지의 장력을 단련하고 또 훈련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게 고통을 준 사람, 불편한 기억, 상처, 몸속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내 삶을 지탱해준 정을 나눈 사람들과 고마운 일들이다. 검푸른 바다가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 위에 배를 띄워 전진하게 하듯, 마음의 힘이야말로 힘겨운 내 시간을 앞으로 끌어당겨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생의 부력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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