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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한 소명의식과 열정 그리고 엄격한 자기제한

교육이야기

by 글샘박선생 2016. 6. 22.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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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12.06.19  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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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의 ‘학문론’
나는 ‘학문’과 ‘과학’을 구분한다. 구체적으로 전자는 전근대와 후자는 근대와 관련시켜서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고 바람직한가라는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학문이라는 말에는 전근대적 행위와 합리성의 의미가, 과학이라는 말에는 근대적 행위와 합리성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의 토대는 근대이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과학(학문)’, ‘과학론(학문론)’이라고 표기하도록 한다. 막스 베버는 체계적으로 과학론(학문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방대한 글과 말을 남겼다. 저 유명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과학(학문)」도 그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교육자 및 편집자로서의 업적, 학회에서의 활동, 독일 대학의 발전을 위한 투쟁 등을 추가한다면 베버는 과학(학문)에 대한 논의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한 준거점이 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베버에게 과학(학문)은 직업이다. 즉 직업으로서의 과학(학문)이다. 이 직업으로서의 과학(학문)이 의미하는 바는, 전문적인 지적 능력을 갖춘 과학자가 전문적인 연구와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서-인문사회과학의 경우-근대세계와 근대인의 삶과 행위 그리고 사회관계와 사회질서에 적합한 문화자본을 축적하고 전수하는 것이다.
이는 전인격적이고 보편적인 교육과 교양 그리고 규범적이고 정치적인 가치판단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베버의 시대진단을 반영하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직업은 근대세계의 문화적-윤리적 기초이다. 직업이야말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책임적으로 행위하는 인간들에게 개인적 삶의 이상과 사회적 요구를 결합시킬 수 있는 기회와 장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근대 자본주의의 직업윤리가 형성된 과정을 문화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그것은 직업으로서의 경제이다. 또한 정치영역에서의 이 문제를 다룬 것이 또 다른 저명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이다. 직업으로서의 과학(학문), 직업으로서의 경제, 직업으로서의 정치, 이 다양한 근대의 직업을 한 군데로 묶는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보다도 순수하게 본분에, 즉 직업노동에 헌신할 수 있는, 그러나 다른 한편 사물과 인간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들의 의지와 능력에 있다.
베버는 이러한 의지와 능력을 인격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근대인의 인격은 분화되고 전문화된 직업에 자신을 금욕적이고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예술가의 인격도 그렇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신의 일에 그리고 오로지 거기에만 헌신한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베버는 역설한다. 베버는 과학(학문)에 대한 전통적인-아니 오늘날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표상을 단호히 거부한다. 과학(학문)은 예술, 자연, 신, 또는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요, 세계의 의미나 가치를 비춰주는 등불도 아니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길잡이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행위하는 개인들의 주관적인 문제로서 객관적 사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과학의 규칙, 논리, 방법의 피안에 위치한다. 객관적 사실 분석하는 방법의 피안 그렇다면 과학(학문)은 아무런 실천적 의미나 기능도 없는 그저 공허한 지적 유희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베버가 보기에 오늘날 직업으로서의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개인적 삶에 실천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첫째,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삶을, 즉 외적인 사물과 인간의 행위를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적 지식을 제공해준다. 둘째, 과학은 사고의 방법, 사고의 도구 및 사고를 위한 훈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셋째, 과학은 우리에게 현안이 되는 가치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입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명백히 밝혀줄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과학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개인이 어떠한 신앙,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과학자는 확고한 내적 소명의식과 열정을 갖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직업적 ‘일상의 요구’(괴테)에 헌신해야 하며, 또한 바로 거기에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 주지하듯 베버는 과학(학문)의 가치자유를 주창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전형적인 상아탑주의자로 낙인찍히고는 한다. 이 주제는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한 가지만 짚어보기로 한다. 베버는 거듭해서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강단을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칫 대학교수는 절대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베버에 따르면 교수도 얼마든지 주관적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강단 밖에서라는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 예컨대 언론매체, 집회, 협회, 에세이 등이 교수들에게 실천적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그들은 거기에서 다른 모든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 또는 악마가 자신에게 명하는 바를 해도 좋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교수가 강단 밖에서 실천적·정치적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시민의 고유한 자유와 권리이며 의무와 책임에 속한다. 아니 더 나아가 그것은 시민적 미덕이다. 이에 반해 만약 교수가 강단에서 가치판단적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방종이 되고 직무유기가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망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가치판단을 요구한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돼야만 한다. 먼저 강단에서 모든 당파적 가치판단이 대변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수가 가치판단을 하는 경우 이 가치판단을 학생들 및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명료하게 밝혀야 한다.
대학, 정신적 자유와 정신적 투쟁의 장 이 대목에서 과연 대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베버에게 대학이란 전문적 연구와 전문적 교육을 위한 문화적·제도적 공간이며, 교수는 바로 이 전문적 과업을 수행하는 직업인간이다. 이러한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가치나, 신조 또는 세계관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전문적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므로 대학에는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주의 등도 둥지를 틀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정신을 더욱 더 다양하게 하며, 대학을 더욱 더 풍요롭게 한다. 요컨대 대학은 정신적 자유와 정신적 투쟁의 場이다. 사실 이러한 베버의 과학론(학문론)은 수많은 오해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렇다.
그것은 고작해야 과학(학문)의 자기제한과 자기체념을 강변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버의 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한 현재성과 현실성을 갖는바, 이는 그것이 단순히 당시 독일 대학의 비합리적 현상에 대한 대증적이고 기능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대세계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보편사적 통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버의 과학론(학문론)은 근대세계에 대한 담론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합리화되고 탈주술화된 개인주의적-주관주의적 가치다신주의 시대에서 과학(학문)과 대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자 철학적 성찰이다. 금욕적이고 엄격한 자기제한과 자기체념은 이 시대의 문화사적 숙명이며 윤리적 정언명령이다. 이미 괴테가 『파우스트』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탁월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듯이!

 
김덕영 카셀대·사회학
필자는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했고, 카셀대에서 대학교수자격취득을 했다. 저서로 『짐멜이냐 베버냐?』 등이 있다. 베버와 짐멜을 근대성의 시각에서 고찰하고 있다.
김덕영 카셀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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