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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

학문이야기

by 글샘박선생 2017. 9. 1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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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소 글
박 원 재(강원대 삼척캠퍼스 강사)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이 서로 원망한 지 오래되어, 이런 까닭에 서로 끊어져 소통되지 못한다(名實之相怨久矣, 是故絶而不交).

  중국의 고전 『관자』「주합」편에 나오는 말이다. 『관자』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가 관중(管仲)의 이름을 가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보다 아래 시대인 전국시대까지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집필된 책이다. 이 책이 탄생한 전국시대는 ‘싸우는 나라들[戰國]’이라는 시대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천자(天子)가 있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갈수록 쇠퇴하고, 대신 그 아래의 여러 제후국들이 천하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이에 따라 주나라의 문물제도는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어가 통치규범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구체제는 무너져가는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는 아직 가시화하지 않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던 것이다.

세대와 진영 논리에 갇힌 말

   가치관의 붕괴에 따른 아노미 현상이 이처럼 일상화되자 공동체의 존립근거인 사회적 합의 체계가 삐꺽거렸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하나가 바로 ‘말[言]’의 혼란이었다. 말의 혼란은 주로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의 불일치로 나타났다. 같은 단어인데 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는 제각각인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대가 바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 가는데, 그것을 담아내는 말은 아직 새로운 옷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앞의 인용문은 바로 당시의 그러한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격변의 시대가 야기한 언어의 혼란, 그것을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 즉 ‘명(名)’과 ‘실(實)’이 서로 원망한 지 오래되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말이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사회는 극심한 변화와 그에 따른 구성원 간의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모양새이다. 이쪽에서 말하는 ‘방송의 공정성’과 저쪽에서 말하는 ‘방송의 공정성’의 의미가 다르고, 저쪽에서 말하는 ‘적폐’와 이쪽에서 말하는 ‘적폐’의 뜻이 다르며, 한 편에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편에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내용이 다르다.

   진영에 따른 갈등만 심각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생각하는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는 ‘담탱이’로 굳어진 지 오래고, 급기야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이미지에 어떠한 흠집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엄마’조차도 세대 간에 의미의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이들의 교실에서 ‘엄마’는 더 이상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단어가 아니라 ‘느금마’와 ‘니애미’라는 비속어로 탈바꿈하여 상대를 놀리거나 멸시할 때 쓰인다고 한다(《시사IN》520호,〈여성혐오 교실을 점령하다〉). 아이들의 교육을 엄마가 전담하는 세태에 그 엄마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의 의식이 투영된 현상이다. 그리하여 “엄마지만, 나에게 잘해준다”는, 기성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표현이 통용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사회의 말의 혼란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기성세대에게 ‘엄마’는 여전히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만든 사람’일지 몰라도 요즘 아이들에게는 가급적 빨리 벗어나고 싶은 간섭의 상징이자 귀찮음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시대의 혼돈은 말의 혼란으로 나타나

   말의 혼란은 단순히 세대 간 의사소통의 불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되는 데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정치를 맡을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일부터 하시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이름부터 바로잡는 일’[正名]을 하겠다고 한 공자(孔子)의 대답 속에 이 문제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무슨 그런 현실감 없는 말씀을 하시냐는 제자의 반문에 공자는 이것의 엄중함을 이렇게 말한다.

   이름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언어가 순조롭게 소통되지 않고, 언어가 순조롭게 소통되지 않으면 일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흥성하지 않고, 예악이 흥성하지 않으면 형벌이 합당하지 작동하지 않으며,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논어』「자로」)

   국가는 기본적으로 공권력의 체제이다. 국가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은 궁극적으로 공권력에 의해 강제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실효성을 지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어떤 국가 속에 산다는 것은 곧 그 국가의 법체계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국가가 정당성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공권력을 합당하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의 발언에서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애오라지 공권력에만 의지해서는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 또한 자명하다. 그 공권력의 행사를 뒷받침하는 공동체의 유기적인 질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악의 흥성’을 말하는 이유이다. 전통적인 유교정치사상에서 예와 악(음악)은 각각 공동체 조직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상징하는 기표이다. 신분질서의 경우에서 보듯이 예는 기본적으로 구분을 지향하는 규범이고, 악은 정서적 교감을 통한 합일을 추구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예악의 흥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유기적인 질서는 그 안에서 진행되는 여러 영역 또는 층위의 일들이 원활하게 성사되어 갈 때 달성되며, 또 그렇게 되려면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순조로워야 한다. 시쳇말로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언로(言路)가 막히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는 이치와 같다. ‘일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하고’ 그 전제조건으로 ‘언어가 순조롭게 소통되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언어를 순조롭게 소통시키는 조건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주고받는 말의 의미가 구성원들에게 공유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시스템이 무너지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고 공자는 말한다.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인간의 기본권부터 연상하는 사람과 이른바 ‘공산독재’에 대한 반대부터 떠올리는 사람 사이에 말이 통할 리 없다. ‘엄마’를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세대와 기회만 되면 벗어나야 하는 질곡으로 생각하는 세대 사이에 의사소통이 순조로울 리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앞날이 희망적일 수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시대의 혼돈은 무엇보다도 말의 혼란으로 나타난다. 지금, 우리시대 말들의 의미가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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