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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에 상처받은 이에게

Quotation(인용)

by 글샘박선생 2016. 5. 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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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사람이라는 환경
  인생에서 앞으로 만나게 될,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이 더 많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껏 만나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무리 조용히 살았다고 해도 나이가 챙겨주는 축적이란 게 있다. 현대사회는 환경 보호나 보존의 문제가 심각한 화두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람보다 더 큰 환경 요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가장 신경 쓰이는 대상은 사람이다. 나무에게 숲처럼, 물고기에게 물처럼, 사람에게는 사회라는 거대한 추상체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만나 말하고 인사하며 마주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밥도 먹고 회의도 같이하고 차도 마시고 일도 한다. 누군지 모르지만 지하철도 같이 타고 한참을 같이 간다. 어깨가 닿을까봐 저만큼 떨어져 앉기는 하지만 벤치도 같이 쓴다. 모두 다 사람이다. 나무와 새, 꽃과 물고기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인사를 나누든 그렇지 않든, 얼굴과 눈빛을 스쳐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나
  사람살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대개의 시간들, 모습들, 그 사람의 내면은 지층에 감춰진 것처럼 잘 드러나지 않아서, 오랜 시간 동안 신뢰를 쌓은 만남을 이어간 뒤에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요즘 같은 속도화 시대에는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드러난 부분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더 흔하게는 소문이나 평판에 의존하는 일도 생겨난다. 그 때문에 관계는 종종 어긋나고 판단은 뒤틀린다. 소문 또한 사람의 일이어서 그것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맥락은 간단치가 않다(한스. J. 노이바우어의 〈소문의 역사〉[세종서적, 2011]를 참조).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인터넷의 ‘악플’처럼 악의적 소문, 또는 무심히, 생각 없이, 재미 삼아 한 말이 당사자에게는 ‘심리 살해’와 같은 치명적인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언어적 존재인 사람이 ‘말’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동시에 우리가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안목을 단련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조선시대에는 이를 ‘지인지감(知人之鑑)’, 즉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사람의 어떤 국면을 접하고, 그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나 마음을 처음 알게 될 때가 있다. 타인이나 나 자신에 대한 앎의 지평이 넓어지고 감각이 증폭되었다는 긍정적 인식을 하기에 앞서 실망하거나, 어쩐지 억울하고 속상해지는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정과 승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를 지금 막 지나가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이것은 암을 대하는 다섯 가지 심리변화, 즉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에 대한 설명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 작가 사노 요코는 〈죽는 게 뭐라고〉[마음산책, 2015]에서 자신은 이 경우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고 적었다. 작가는 잘생긴 의사를 보고 입원을 결정할 정도로 충동적이고, 이제 2년 남짓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 남은 돈을 펑펑 썼는데, 더 살게 되었다며 주치의에게 따질 정도로 유쾌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하지만 암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적었을 때 독자로서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감성의 차원에서도 승화되지 않는 고통이란 게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상처 입은 마음을 돌보는 한갓된 정성들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이른바 ‘갑질’ 논쟁과 감정 노동이라는 용어로 일상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상처받고 있다. 일상에서 잘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관련 기사가 뉴스화 되었을 때 거기에 감정을 이입해서 공감하고 분노하며 울분을 토로한다. 거친 욕설을 하지 않더라도 세련되고 정당하게 모욕감을 주는 풍부한 노하우가 발달되어 있는 반면, 그에 대한 개개인의 대처는 턱없이 미흡하다.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저마다의 위상 속에 고립되어 있는지 모른다. 상처를 주든 받든, 환경의 차원에서는 너 나를 가리는 게 무의미하다. 상처 자체가 위험과 불안의 신호이자 징후이며, 사람살이라는 환경 전체에 대한 훼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가 환경이다. 동료나 파트너라는 좋은 말도 있지만, 위계화된 사회관계 속에서 성찰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환경이라는 개념으로 서로를 대상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뒤돌아보았을 때 아름다운 사람, 먼 시간 후에도
  내 생각에는 이렇다. 사람에게 사람이 환경이고, 우리가 ‘아름다운 환경’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먼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죽음을 수용하는 다섯 단계처럼(은연중 나는 ‘마음의 상처’를 ‘육체적 죽음’이라는 고통에 빗대고 있다.), 스스로의 삿된 감정이나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을 넘어서, 오랜 시간 동안 감정과 앎이 정돈되고 단련된 다음에, 마음의 심연에서 살아남아 내 인생을 튼튼하게 지탱해준 그 무엇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잘 해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고맙고 좋은 사람이며 이로운 사람이 분명하지만(예컨대 정치적 편당이나 이념적 동맹 관계 같은 것),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는지는 먼 시간 뒤에나 알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겪는 하나하나의 상처를 넘어서 세월의 주인이 되었을 때, 생각의 여운 속에서 옅지만 가장 확실한 향기로 떠올려지는 사람, 나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상태로 마주했던 사람이라야 아름답다는 수식을 붙이기에 떳떳하다. 

  앎과 경험이 축적되어 물체와 영물로 경계를 이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언제까지나 사람의 육체와 마음, 정신과 감각에 튜닝하면서 결단코 사람의 향내를 끝까지 간직하던 사람(예컨대 여우 같은 사람, 벽 같은 사람이 아닌 그냥 사람 냄새 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누군가(또는 무언가)를 밟거나 상처 주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거나 지나치고, 일으켜 세워준 사람. 물을 주고 때로는 별의 방향을 가르쳐 준 사람. 

  승냥이의 시간 너머에 꽃 비 내리는 날이 찾아온다고 말해준 사람.

  벚꽃나무 아래서
  아름다운 4월의 벚꽃이 피고 또 지는 계절이다. 마른 줄기에서 피워낸 꽃망울은 갓 내린 봄비를 맞은 것처럼 촉촉하고 여리다. 꽃잎이나 향기는 오랜 나무의 세월을 전혀 타지 않은 듯, 늘 새롭고 풋풋하다. 신선하고 청량하다. 자연에게서 나무에게서 사람은 여전히 아직 배울 게 많은 것 같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 사람을, 그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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