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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잡설들

by 글샘박선생 2018. 1. 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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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로 개봉된 1987년 그 시절, 난 고등학교에서 집을 오가는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니며 이따금씩 소위 당시 용어로 '데모'를 하는 학교 바로 옆 A모 대학 옆을 위태롭게 다니고 있었다. 그시절 오히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차려, 경례,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후일 군대에 가서 하게 된 내무반의 점호 같이 반장이 일괄 통제하던 학교였다. 지금 내 은사님들과 친구, 선후배들이 페친으로 얽혀 계시므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건 참 쑥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지만, 당시의 체육복과 하계 교복을 기억해 보면 지금 후배들의 그것은 상전벽해겠지만, 그러고 다녔다는게 참 신기했다(아,하계 교복은 요즘도 유명하긴 하다). 국민학교 때는 온통 교실 밖이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김일성에서 그나마 얌전해진 꼴이었으니.
미션 스쿨이었고 대학이 옆에 있어서 분위기 파악이 될법 하련만, 그때는 정말 폐부 깊숙히 파고드는 그 무엇은 없는 채로 막연한 느낌으로만 학교를 다닌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의 친구들과 추억들이 지금 나의 호흡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보니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1987의 폭풍이 지난지 조금 되었음에도 여전히 군사정권 3기의 분위기와 전혀 모순되는 올림픽 이후의 풍요로움이 어울리지 않는 동거를 하던 시기였다. 입시라는 속박에서 내가 꿈꾸던 방향과는 다르지만 원하던 전공을(그게 업보가 되는 건 20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ㅠㅠ) 공부하는 보람과 여전히 정치적 해방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던 사회인식을 마주하며 이성과 감성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수업거부를 하는 와중 지금은 다른 대학에 계신 교육학 전공 교수님의 수업을 듣겠다며 우리 과에선 유일하게 강의실에 들어간 '배신자'이기도 했지만, 영자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해방뜰에 전체 학생이 모였을 때 늘봄 문익환 목사님의 일장연설을 들으며 가슴 먹먹한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짠하다. 시나브로 한국사의 현실을 책이 아니라 맘으로 서서히 받아들이던 시기였던 것 같다.
아직 1987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사실 부끄럽기까진 모르겠지만, 맹탕이고 순진하기 이를데 없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과연 나에게 얼마나 다르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상전벽해는 커녕 아직 더 뻑뻑한 삶 속에 곤궁하지만, '그날이 오면'과 더불어 획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멋모르고 살았던 그 시절이 과연 어떻게 다가올까라는 기대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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